베네치아의 어떤 귀족이 한 조각가에게 “그대는 열흘 만에 만든 조그만 흉상 하나에 대해 50제키노나 내라고 하는 건가?”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각가가 대답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열흘이 걸렸지만 이런 작품을 열흘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김정빈 저(著)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 (동쪽나라, 294쪽) 중에 나 오는 구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는 데 얼마 걸렸습니까?” 화가가 대답하였습니다. “5분 걸렸고, 평생이 걸렸습니다.” 화가의 숙련된 5분은 수천 번의 붓질, 수만 번의 시도 끝에 얻은 5분 입니다. 5분의 붓질, 열흘의 조각, 그 속에는 한 사람의 평생이 들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결과를 가능케 한 켜켜이 쌓인‘시간의 축적’을 보아야 합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깊고, 믿음이 단단하며, 삶의 열매가 풍성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종종 그 순간만을 부러워합니다. 하 지만 그 믿음의 뿌리에는 수많은 무릎 꿇은 시간, 말씀을 붙잡고 씨름한 날들, 이해되지 않아도 끝까지 붙든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
“유대인 부모들은 자식이 최고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하 느님이 개개인에게 남과 다른 독특한 달란트를 주신 것을 믿는다. 그 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하느님이 주신 독특한 재능을 살려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베스트(best)’는 단 한 명뿐 이지만 ‘유니크(unique)’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 홍익희 저(著) 《유대인 창의성의 비밀》 (행성B잎새, 117쪽) 중에 나 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넘버 원(number one)의 세계가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의 세계입니다. 넘버 원이 되려 하면 온 세상 사람이 경쟁자가 되지만, ‘유일’한 사 람이란 걸 아는 순간에 우린 각자가 ‘소중한 존재 ’가 됩니다. ‘넘버 원’이 되기 위해 살면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행해지지만, ‘온리 원’이 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360명에게 각자의 분량에 맞는 사명을 주셨 습니다.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적게 주신 자에게는 적게 찾 으십니다. 360명이 360도의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3
아들들이 자수성가하여 괜찮은 중소기업 대표로,큰 회사 전무로 모두 살 만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예전부터 살던 작은 집을 고집하며, 자녀들이 아무리 권해도 아파트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녀들은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뜻밖에도 쉽게 허락을 하더 니,단 새 집을 지어주려면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집은 성이라야 하네. 그 성에는 문 열두 개, 보석으로 만든 기초석 열두 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마루는 자수정, 길은 황 금으로 깔아주시게.” 자녀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 없으면 관두게나. 나는 이미 그 집을 저 하늘에 준비해 두었으니” 이동원 저(著) 《믿음의 모델링에 도전하라》(생명의말씀사, 63-6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성경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합니다. 그 성은 열두 기초석이 보석으로 장식되고, 거리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깔려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비추어 해나 달이 필요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이 천국 약속은 가장 환희로운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우리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인지 모른 다. 깨달음을 얻어 돌아올 수도 있고,황금과 명예를 얻어 귀향할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의 비밀을 이해할 수도 있고,자기 존재의 비밀을 깨 닫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돌아올 수 없는 하나의 헤어짐이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그 다음’이 없는 끝 이다(중략). 존재하는 동안 ‘끝’이란 없다. 모든 ‘끝’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죽음만은 다르다. 죽음은 ‘그 다음’이 불가능한 ‘끝’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험과 탐 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지 모른다.” 김대식 저(著) 《김대식의 빅퀘스천》(동아시아, 28쪽) 중에 나오는 구 절입니다. 세상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실패는 다시 도전의 문을 열고,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죽음만은 ‘그 다음’이 없는 종착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던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정치가의 면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오로지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서 욕망을 달 성한 여인으로만 남겨놓았다. 로마가 자랑하는 두 영웅 카이사르와 안 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클레오파트라가 몹시 괘씸했던 모양이다. 그 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를 요염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야심 만만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재평가해 주는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 저(著) 오화정 역(譯) 《국가와 역사》(혼미디어, 4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오랫동안 ‘치명적인 여인’으로만 기억되어 왔습니다. 로마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자신의 욕 망을 달성한 요부로 남았고, 그 정치적 기개와 국가적 투쟁은 철저히 가려졌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단순한 매혹의 화신이 아니라,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정치가였습니다. 물론 그녀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조국 이집트의 독립을 걸고 승부에 나섰다가 보기 좋게 참패했다(중략). 자신의 매력을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소포클레스 저(著) 천병희 역(譯),《소포클레스 비극》 (단국대학교출판부, 10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두타산」에서 인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이 시를 듣자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산이 산을 무서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무서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무서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무서워한다...” 옛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옛날부터 밤길을 가다가 짐승을 만나면 훈기(薰氣)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면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참 무서운 건 짐승도 귀신도 아니라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만큼 그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죄성 가득한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된 사람만큼 그리운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