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자기 작품에 대해 책
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중략).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
품의 미숙함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시나 그림에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일 터다(중략).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무제〉다.”
정호승 장석남 안도현 하응백 공저(共著)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공감의 기쁨, 7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무제(無題) - 박재삼 -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체바퀴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알 듯 모를 듯한 존재의 신비 앞에서 오십을 넘기도록 인생의 신비를
못캔 시인은 시의 제목을 ‘무제’라고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명저 《논리 철학 논고》의 마지막 구절을 철학
사에 남는 유명한 말로 장식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성탄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어떤 언
어로도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십을 넘기도록 인생의 비밀을
못 캔 시인처럼, 우리도 평생을 살아도 다 깨달을 수 없는 이 사랑의
깊이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을 뿐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