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통신] 바닷바람이 스며든 골목마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삼도수군통제영의 영광에서 일제강점기의 상흔, 신시가지의 흥망성쇠까지, 통영 원도심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품어왔다.
한때 가장 번성했던 거리는 세월과 함께 빛을 잃었지만, 이제 다시 그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
통영시는 이러한 원도심의 가치를 회복하고 미래세대가 누릴 자산으로 이어가기 위해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은 근대역사ㆍ문화자원이 밀집된 공간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근대의 흔적 위에 통영의 미래를 짓다
통영 중앙동과 항남동 일대는 한때 도시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통제영 거리의 흔적과 대한제국 시기의 매립사업,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 근대 도시의 형성과 번영이 켜켜이 남아 있다.
근대주택과 상가, 여관, 상점은 물론 문학가 김상옥의 생가까지 집중적으로 보존돼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활용 가치가 높다.
시는 쇠퇴한 원도심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2019년 국가유산청 공모에 도전해 2020년 중앙동과 항남동 일대가 ‘통영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됐다.
목포, 군산 등 지금까지 총 9개 시ㆍ군이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됐으며, 시는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2023년부터 본격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기존의 개별 문화유산 중심 관리 체계를 벗어나 문화유산이 집적된 구역을 선(線)ㆍ면(面) 단위로 보존ㆍ정비하려는 국가유산청 정책이다.
대상지는 약 1만4천㎡ 규모로 국가등록문화유산 8개소와 등록문화자원 9개소를 비롯해 총 148필지가 포함된다.
시는 현재까지 150억 원을 확보해 문화유산 매입과 보수, 경관 회복 등 사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는 사업 성과를 인정받아 내년도 예산 20억 8천만 원을 사전 승인받았다.
사업의 핵심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도시의 미래로 불러오는 일’이다.
조선시대 통영성의 번영과 일제강점기의 저항, 근대문학의 태동, 항만 생활사의 흔적까지—통영의 정체성을 응축한 공간을 지켜내고,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쌓아 올리는 작업이다.
천영기 통영시장은 “통영의 심장부인 원도심이 다시 살아나야 통영시 전체가 활력을 얻는다”며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은 과거의 흔적을 지키는 동시에 미래 세대가 누릴 도시의 자산을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살아 움직이는 근대역사문화공간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거리를 중심으로, 건물을 매개로, 그리고 사람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먼저 원도심의 골목은 세 개의 테마거리로 새롭게 태어난다.
세병로는 삼도수군통제영과 맞닿아 있던 역사의 거리를 따라 12공방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잇는 공예 창작ㆍ체험 공간으로 꾸며진다.
항남1번가는 근대문학의 발상지라는 정체성을 살려 문학의 거리와 전시, 소규모 공연장이 연결되는 창작 무대로 변모한다.
강구안길은 항만 생활사의 흔적을 담아, 통영의 기억을 전하는 길로 재정비된다.
거리를 따라 들어서면 건물 하나하나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입혀진다.
지금까지 확보된 8개 동 가운데 4개 동은 다음 달 복원을 앞두고 있다.
김상옥 생가는 기념관으로 개관해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전하며, 김양곤 가옥은 카페로 변신해 주민과 여행자가 머물며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된다.
동진여인숙은 체험형 스테이 공간으로, 구 대흥여관은 통영 근대 사진 전시관과 체험형 사진관으로 단장해 근대의 정취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4개 동은 현재 보수 설계가 진행 중이다.
3개 동은 청년 창작자와 예술인이 협업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특히,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과 연계해 창작과 전시, 판매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함으로써, 청년과 예술인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남은 1개 동도 원도심 문화활동을 뒷받침할 공간으로 새롭게 쓰인다.
또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밀집된 김상옥 생가 주변 부지를 매입, 철거를 거쳐 쉼터로 조성된다.
항남 1번가 김상옥 생가 인근 부지로,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버스킹 공연과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도심 속 정원이 될 예정이다.
방문객에게는 여유로운 쉼을, 시민들에게는 일상 속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열린 무대다.
이와 함께 근대 사진부스가 네 곳에 설치돼 QR코드 스탬프 투어와 연계해 관광객을 구도심으로 이끌고 지역 상권과 연결되는 콘텐츠로 작동한다.
통영근대역사문화공간 내 일반 건축물에도 리모델링 지원이 이뤄져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특색 있는 근대 테마거리’ 조성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시는 2025년 조례 제정을 통해 최대 3천만 원(자부담 10%) 규모의 지원 기준을 마련했으며, 향후 약 50여 개 동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볼거리 중심의 관광을 넘어 공간 속에 머무르고 도시의 이야기를 체험하는 ‘체류형 문화ㆍ관광 모델’로 확장되고 있다.
과거의 거리가 오늘의 이야기로, 오래된 건물이 새로운 문화로 다시 살아나며 원도심은 살아 움직이는 무대로 거듭나고 있다.
통영시는 강구안, 동피랑 등 구도심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SNS를 통해 콘텐츠를 홍보해 방문을 유도할 계획이다.
통영다움으로 완성하는 통영근대역사문화공간
통영근대역사문화공간의 진가는 단순히 건물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다. 목포가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했다면, 통영은 예술ㆍ공예ㆍ문화가 일상에 스며드는 ‘오감으로 느끼는 문화예술 도시’를 지향한다.
세병로는 공예 체험 작업장으로, 항남1번가는 문학과 공연이 어우러진 문화의 골목으로, 강구안길은 항만의 기억을 공유하는 역사 산책로로 확장된다.
여기에 체험형 스테이(동진여인숙)와 전시ㆍ체험 공간(구 대흥여관) 등 머물며 즐기는 콘텐츠가 더해져, 단순한 관광을 넘어 체류형 문화 경험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과정은 행정 주도가 아니라 시민과 청년, 예술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변화라는 점에서 통영만의 힘이 드러난다.
에필로그 – ‘통영의 시간’을 걷다
통영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사업은 주민들의 삶과 도시의 정체성을 함께 그려가는 긴 여정이다.
통영시는 근대역사문화유산의 가치와 진정성을 지키며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역사를 배우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도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시, 그 중심에는 ‘통영다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시작으로, 통영의 미래 전략과 연결되며 도시의 성장축을 형성하고 있다.
바다와 예술, 역사와 일상이 함께 어우러진 통영의 정체성. 그것을 지켜내고 확장해 나가는 일이 곧 통영의 미래를 여는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