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
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경험
이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著) 문현미 역(譯) 《말테의 수기》
(민음사, 26-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는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한평생을 통째로 살아낸 사람의 언어입니
다. 따라서 깊은 삶이 없으면, 깊은 언어도 없습니다.
시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한평생을 기다립니다. 수많은 도시의 골목을
걸어야 하고, 낯선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해야 합니다. 새벽 이슬 맺힌
꽃잎의 떨림을 알아야 하고, 새들이 하늘을 가르는 궤적을 느껴야 합니
다. 감정은 쉽게 오지만 경험은 천천히 쌓입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말이 시가 됩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사람들,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
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27쪽)

설교도 그러합니다. 좋은 시는 사람을 살리고, 좋은 설교는 영혼을 살
립니다. 좋은 시는 오래 숙성된 삶의 열매이고, 좋은 설교는 오래 순
종한 영혼의 열매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통해 한 줄을 얻고,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 한 구절을 얻습니다. 시는 눈물의 잔을 다 비운 후에야 비
로소 한 줄이 되고, 설교는 무릎의 기도를 다 흘린 후에야 한 문장이
됩니다. 릴케가 말했듯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한평생의 경험이 필
요하듯”, 설교도 단숨에 써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더니”(눅 6:12)
깊은 설교는 성경과 깊은 무릎에서 나옵니다.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