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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망치는 순간


김종삼 시인의〈묵화(墨畵)〉는 이렇게 시작한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나는 이렇게 바꾸어 읽어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

피동접미사 ‘히’를 빼고 나면 시의 호흡이 별안간 빨라진다. 할머니의
손길이 소 목덜미까지 가닿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렇게 되면 소를 쓰다
듬는 할머니 손길의 경건함도 지긋한 사랑의 느낌도 사라지고 만다.
시를 망치는 순간이다.

정호승 장석남 안도현 하응백 공저(共著)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공감의 기쁨, 8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떤 손길은 천천히 내려앉아야 합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질 때, 공기는 가만히 숨 죽이고 햇살이 조금씩 기울고 물소
리가 잦아듭니다. 그 느린 강물 같은 시간 속에서 사랑이 스며듭니다.
그러나 ‘히’ 하나를 빼면 손이 얹어집니다. 단번에 그 순간 시간은
사라지고 애틋함도 흩어집니다.

 

 

신앙도 이와 같아서, 내가 서둘러 손을 ‘얹는’ 조급함보다 주의 은
총이 내 삶에 ‘얹혀지는’ 기다림 속에 성화(聖化)가 일어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a)
성급히 행하기보다 하나님의 손길이 머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
다. 조급한 마음으로 ‘히’를 빼버린 채 내 속도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할 때, 주님의 세밀한 숨결을 놓치고 맙니다.

 

 

내 의지로 세상을 휘두르려 하기보다 주님의 손길이 내 삶의 목덜미에
고요히 ‘얹혀지기를’ 기다리는 경건한 ‘묵화’의 주인공이 되면 좋
겠습니다.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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