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시인 오규원의 시 「죽고 난 뒤의 팬티」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벼운 교통사고 후, 시속 80킬로만 되어도 앞 좌석을 움켜쥐며 “오늘
깨끗한 팬티를 입었나?”를 걱정한다는 시인의 고백은 우리를 웃게 만
듭니다. 죽음보다도 죽음 뒤에 남을 민망함을 걱정하는 시인. 죽음이
라는 거대한 소멸 앞에서 고작 속옷의 청결을 걱정하다니요. 하지만 이
우스운 고백 속에 우리의 민낯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남
에게 보일 내 모습을 걱정하는, 타인의 시선에 묶인 존재들입니다.
‘죽고 난 뒤의 팬티’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순간, 세상에 남겨질 내
마지막 모습, 그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시인은 죽고 난 뒤 수습될 육신의 부끄러움을 염려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 육신의 옷이 벗겨지고 난 뒤, 하나님 앞에 설 내 영혼의 속옷은
깨끗한가?”
사고 현장의 구조대원이나 장례지도사에게 보일 속옷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드러날 내 삶의 민낯입니다.
세상의 평판이나 체면이라는 겉옷은 화려하게 챙겨 입으면서도, 정작
하나님 앞에 보일 삶의 정결함은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
다.” (계16:15)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