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하염없이 바라 보았
다.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주구장창 변화가
없는 자연을 보며 명상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바의 로고,영양 개요,성분 목록을 살살이 들여다보았다.
그 짓마저 따분해질 무렵,내가 기고하고 있던 잡지에 보낼 기사 아이
디어가 열일곱 개도 넘게 떠올랐다. 그중 몇 개를 작은 오렌지색 방수
노트에 적어두었다.”
마이클 이스터 저(著) 김원진 역(譯) 《편안함의 습격》
(수오서재, 14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대체로 피해야 할 감정, 무가치한 공백으로 여깁니다.
스마트폰의 알림, 끝없이 이어지는 영상과 음악, 언제든 열 수 있는 인
터넷의 바다 덕분에, 지루함을 불편한 감정쯤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마이클 이스터는 “지루함은 인간에게 이로운 불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자연을 바라보다가, 많은
아이디어가 솟아났던 경험을 기록합니다. 지루함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창의성과 성찰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연구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 캐나다의 한 실험에서 지루한 영
상을 본 집단은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가 활발히 작동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멍하니 있을 때 활성화되며,
뇌가 정보를 정리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통로가 됩니다.
실험 후 지루함을 경험한 집단은 창의력 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이는 지루함이 단순한 정지 상태가 아니라, 내적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사고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루함은 ‘참아내야 할 시간’이 아니라 ‘떠올리기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지루함은 결핍이 아니라 여백입니다. 음악에서 쉼표가 없
으면 곡이 산만해지듯, 삶에도 텅 빈 순간이 있어야 새로운 멜로디가
시작됩니다. 지루함을 견디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집중력과 창의
성, 그리고 정신적 평온을 되찾는 열쇠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멈춤’과 ‘기다림’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b).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을 넘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라는 영적인 초대입니
다. 분주한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고요함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