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목사가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식이 끝나고 목사가 부
모와 회중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아기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가야, 이 세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너를 앞으로 평생
동안 걸어갈 여행길로 맞아들인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께서 너의 삶을 통해 이루실 일의 시작이란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디로 이끄실지,
그래서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
다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뿐이란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 월리엄 월리몬 공저(共著), 김기철 역(譯) 《하나
님의 나그네 된 백성》(복 있는 사람, 81-8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동원목사의 《다시 들어야 할 처음 복음》에 이런 권면이 나옵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종종 복음의 초점이 잘못 강조된 다른 복음들이
등장한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참된 복음의 변질을 가져오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그릇된 복음의 한 형태가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혹은 ‘번영 신학 (Theology of prosperity) 이라고 생각합니
다.”(123쪽)

번영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현실적 축복이 쏟아지고
병도 들지 않고 출세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리고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모두 현실적으로도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보편적 경험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손해 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병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살려 하기 때문에 핍박받고 손해보기도
합니다. 참된 복음은,예수를 믿기 때문에 삶에서 더이상 고난이나 역
경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면제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성도는 고난을 맞이하는 신앙의 태도가 다르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승리 뿐만이 아니라 고난까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
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의 의미 중 하나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하나님은 형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2)
노예 생활이 무슨 형통이겠습니까.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위치도 차지하는 것이 형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형통하
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지금 비록 번영이 임하지 않했더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입니다.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