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 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 이고요,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박웅현 저(著)《책은 도끼다》 (북하우스, 4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꽃 피고 지는 것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속도 경쟁 속에서 살 아갑니다. 그래서 흘깃 흘려 보는 관찰만 있고, 깊이 보고 듣는 견문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전 국토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망이 생긴 덕분에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대륙을 횡단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속 100 킬로미터로 달리면 목적지까지는 빠르게 갈 수 있어도, 깊고 푸른 풍광을 볼 수 없습니다. 속도는 풍경을 죽입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걷는 속도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깊이 보면 매화 한 송이에서도 시심(詩心)이 떠오르고, 어려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창의력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진(眞) 풍경을 보여주실 때가 있 습니다. 그러하기에 깊은 고난의 때는, 깊은 발견의 때이기도 합니다. C.S. 루이스가 표현한 대로 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확성기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 나이다.” (시119:67) <경건 메일> 아시아통신 김광부 기자 |